음악회가 있는 날은 꽤나 추웠다. 봄이 오는가 싶었는데 웬걸 봄의 문턱에서 겨울이란 녀석이 으름장을 놓나 보다. 저녁에는 바람이 속살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속을 후비고 파고든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때론 애절하게 때론 간질거리며 우렁우렁하기도 한 클라리넷 소리였다. 그 소리의 말하는 것에 따라 감정은 이리저리 술렁대며 그렇게 밤은 깊어 갔다.

처음 클라리넷을 읽어준다는 제목을 보고 연주와 그에 대한 배경 이야기로 치부했었다. 다만 부제가 사임당의 꿈이라는 게 영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음악회가 시작되고 주희현 목사가 책 한 권을 가지고 등장하자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역사소설, 주원규의 ‘사임당 그리움을 그리다’였다.

먼저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어 음악이 연주되는 그런 흐름이었다. 이야기는 소설을 바탕으로 하여 다섯 주제를 따라 흘러간다: 1. 꿈의 시작 높은 이름을 만나다 2. 꿈을 걷다 이름을 지으며 3. 꿈을 살다 현실의 무대에서 4. 꿈을 놓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5. 꿈의 완성 자유와 나비. 그리고 그에 맞춰 음악이 연주된다: 멘델스 존의 ‘봄의 노래’, 크룁시의 판타지 “마탄의 사수”(베버), 슈만의 가곡을 리스트가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헌정”, 프랑크 와일드 혼의 “only love”, 몬티의 “차르다시(집시의 노래)”. 이야기와 음악이 만나 마치 둘이 애초에 하나인 것처럼 느껴졌다.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와 음악이 만나 하나로 엮인다.

‘봄 노래’는 사임당의 꿈이 되고 한껏 꿈에 부풀어진다. 이율곡의 어머니로 기억되는 사임당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조선 시대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아내로서 남편을 잘 뒷바라지하고 자식들을 잘 양육하는 꿈을 꾸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가 당대의 다른 여성들과 달라지는 분기점은 그녀에게 이름이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 여성이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특별하다.

이름에는 특별한 꿈이 깃들기 마련이다. 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녀의 꿈이 담긴 이름, 그 꿈은 정말 좋은 꿈이었을까? 어쩌면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클라리넷의 선율이 이것인가 저것인가 고뇌하며 멈칫멈칫하는가 싶더니 무엇인가 발견한 기쁨과 다 얻은 듯 한 성취를 피아노와 주고받는다. 이제 정상을 향해 신나게 내달리며 마치 “인생은 즐거워”하고 외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즐거움도 잠시 이내 조용한 침묵에 잠긴다. ‘정말 내가 얻은 것이 진실인가?’고뇌하는 밤이 이어진다.

사임당의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남편이 출세하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무능한 남편 대신 사임당은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그녀였지만 자신의 재주를 팔아 자식들을 가르치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피아노로 연주되는 “헌정”에 그녀의 마음이 표현되는 듯하다.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마냥 좋기만 할 것 같지만 복잡하기만 하다. 자잘한 소용돌이가 일어나 나른한 즐거움과 함께 격정적인 순간들도, 힘겨움도 뒤엉켜 있다.

사임당은 남편에게 “당신을 놓아 주겠다”고 말한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하지만 그것은 이제야 비로소 남편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남편 또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내의 가장 행복해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드디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제대로 된 “사랑(Only Love)”이 시작된 것이다. 사랑의 선율이 점점이 박힌다. 클라리넷의 한 음 한 음이 마치 간곡한 사랑의 언어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하다. 달콤한 언어로 따뜻함을 가득 안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이 순간 검정색 클라리넷 본체에 금빛 금속들이 클라리넷 연주자 양송희의 금빛 드레스와 절묘하게 조화되며 너무 사랑스럽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이 순간에 빠져들고 싶다.

이제 신사임당은 집요하게 이루고자 했던 꿈들을 접는다. 그러자 모든 것이 포기된 것처럼 보인 그곳에서 꽃과 나비와 같은 미물에 시선이 머물게 된다. 형언할 수 없는 색의 향연과 자유를 향한 꿈이 시작된다. 막다른 꿈은 또 다른 비상을 꿈꾸게 하는 절벽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 ‘집시’. “집시의 노래”는 자유를 꿈꾸는 자들의 노래이다. 무너지는 것 같은 강한 시작은 절망적인 느낌 속에 감추어진 자유였다. 이제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희망이 움튼다. 끊긴 것 같던, 보이지 않던 샘이 솟구쳐 오르듯 안에 고여 있던 즐거움이 일어난다. 이제 여유로움까지 더해져 진짜배기 감정이 살아온다. 솟구쳐라 힘, 솟구쳐라 희망.

갤러리 ‘쉴 만한 물가’에 전시된 그림마저 덩달아 꿈을 말해 주는 ‘살아있는 밤’이었다. 자유를, 꿈을 다시 희망한다.

백은주(청주 남부은샘교회 부목사)